선교

“토마스 선교사, 해안→내륙 선교 전환한 선구적 전략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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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 부설 교회선교연구소와 예장 합동 토마스선교사기념관 설립위 공동 포럼

▲기념 촬영 중인 참석자들. ⓒ강혜진 기자

▲기념 촬영 중인 참석자들. ⓒ강혜진 기자

한국 개신교 최초의 순교자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1839~1866) 선교사에 대한 순교 담론의 종합적 평가 포럼이 3월 30일 총신대학교 신관 콘서트홀에서 진행됐다.

이날 포럼은 토마스 선교사에 대한 2세기에 걸친 담론들을 학문적으로 성찰하고 종합적으로 평가하기 위해 마련됐으며, 특히 총신대 부설 교회선교연구소와 예장 합동 총회 토마스선교사기념관 설립위원회가 공동으로 주최해 많은 주목을 받았다.

1부 예배는 태준호 장로(총회 토마스선교사기념관 건립위원장)의 사회로 김형곤 장로(전장로부총회장)의 기도, 성경봉독, 총신대 박성규 총장의 설교, 고광석 교수(목회신학전문대학원)의 축도로 드렸다. 박 총장은 ‘사자와 어린 양’(계 5:5~6)이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예수님은 왕이시지만 제물이 되셔서 죽는 길을 택하셨고, 그것이 바로 십자가였다“며 “1세기에 십자가는 ‘죽음’이었고, 기독교 역사는 그것을 통해 확산돼 왔다. 교부 터툴리안은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라고 했다. 오늘 한국교회는 160년 전 토마스 선교사가 대동강변에서 흘린 피를 바탕으로 세워진 것”이라고 했다.

박 총장은 “토마스 선교사가 우리에게 준 유산은 첫째가 성경이고, 둘째가 십자가의 도를 실천하고 순교로 그 본을 보여 준 것”이라며 “고난주간 시작일에 열리는 오늘 포럼을 통해 십자가를 더 깊이 묵상하며, 주님의 영광과 복음을 위해 우리 모두가 순교의 정신에 동참하길 바란다. 적어도 우리가 순교의 정신으로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한국교회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전했다.

이후 김영민 교수(총신대 선교대학원)의 사회로 진행된 포럼에서는 네 차례의 발제가 이어졌다.

토마스 선교사 순교 담론, 여러 해석들 교차
192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형성 및 확산돼

▲이은선 교수. ⓒ강혜진 기자

▲이은선 교수. ⓒ강혜진 기자

‘해방 이전 토마스 선교사 순교 담론 형성 과정 연구’라는 제목의 발제를 맡은 이은선 안양대 명예교수는 “해방 이전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 담론은 정부 기록과 민간 기록, 그리고 선교사들의 해석이 교차하며 형성된 것으로 나타났다”고 전했다.

이 교수는 “조선 정부는 『고종실록』, 『승정원일기』 등 공식 기록을 통해 ‘제너럴 셔먼 호 사건’을 불법 침입에 따른 충돌로 규정하고, 토마스 선교사의 활동이나 성경 배포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반면 『패강록』, 『용호한록』 등 민간 기록에는 약 4일간의 협상 과정과 사건의 구체적 정황이 담겨 있으며, 초기에는 해당 선박이 침략선이 아닌 무역선이라는 인식도 존재했다”고 전했다.

이 교수는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은 토마스의 죽음을 조심스럽게 언급하거나 제한적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게일, 마펫 등 선교사들의 기록을 거치며 사건 해석에 변화가 나타났다. 특히 마펫 선교사는 1909년 발표에서 ‘토마스가 성경을 배포하다 죽임을 당했다’는 점을 강조하며 그를 한국 개신교 선교의 출발점으로 평가했다”며 “이는 토마스의 죽음을 단순 사건이 아닌 신앙적 의미로 재해석하는 계기가 됐고, 평양 교회의 기원과 연결되는 서사로 발전했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토마스에 대한 ‘순교’ 담론은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형성·확산됐다. 1925년 평양노회 기록에서 처음으로 ‘순교’라는 표현이 공식화됐고, 이후 장로교 중심의 저술과 교회사 편찬을 통해 이 인식이 확립됐다. 이 교수는 “특히 천주교의 시복식과 같은 종교적·국제적 흐름이 영향을 미치며 개신교 내부에서도 순교 개념이 적극 수용됐고, 이후 국내 장로교 선교사들의 저술 등을 통해 한국교회 전반으로 확산됐다”고 했다.

▲이영식 교수. ⓒ강혜진 기자

▲이영식 교수. ⓒ강혜진 기자

이어 이영식 한국연구재단 학술연구교수가 ‘토마스 선교사 내한 활동과 순교에 대한 힌국 기독교인의 인식에 대한 연구’라는 발제를 통해 토마스 선교사의 내한 활동과 순교에 대한 한국 기독교인의 인식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설명했다.

이 교수는 “존 로스는 자신의 저서에서 존 칼빈의 젊은 시절 헌신을 조명한 ‘젊은 칼빈’(The young Calvin)에 빗대, 토마스를 ‘젊은 선교사’(Mr. young missionary)로 언급하며 당시 선교사들의 순수한 열정과 헌신을 조명했다”며 “열악한 교통과 불안정한 국제 질서 속에서도, 토마스는 복음 전파와 성경 배포를 위해 제너럴 셔먼 호를 타고 조선에 입국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신앙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평안하고 살고 있는 21세기의 우리가 19세기 선교사들을 평가하는 것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살리는 신학을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토마스 선교사의 입국 목적은 명확히 복음 전파에 있었으며, 실제로 조선에서 성경을 나눠 준 여러 사례가 전해진다. 오문환의 기록과 『도마스 목사전』 등에 따르면 최치량, 홍신길 등 초기 신자들이 토마스를 통해 신앙을 접한 인물로 언급된다. 또한 『고종실록』과 『패강록』 등에는 그의 입국 후 활동이 기록돼 있었는데, 패강록은 그의 첫 번째 목적이 선교에 있었다고 기록했다. 초기 한국교회는 이러한 전통을 바탕으로 토마스의 활동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며, 그의 순교를 한국교회 형성의 씨앗으로 이해했다.

이 박사는 “그러나 1980년대 이후에는 비판적 시각도 등장했다. 일부 연구에서는 제너럴 셔먼 호의 입국 목적을 상업적·정치적 시도로 해석하거나, 토마스의 죽음이 순수한 신앙적 순교였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특히 북한에서는 김일성과 그의 증조부 김응우를 우상화하면서 반기독교적 서사를 강화해 나갔다”고 했다.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 내에서는 토마스 선교사의 죽음을 신앙적 순교로 받아들이는 전통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으며, 그의 희생이 한국교회 성장의 중요한 토대가 됐다는 인식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고 전했다.

北, 체제 유지 위한 선전 체계로 셔먼 호 사건 이용
수령 신격화 대체할 수 있는 신앙적 구조 제시해야

▲하광민 교수. ⓒ강혜진 기자

▲하광민 교수. ⓒ강혜진 기자

‘토마스 선교사 순교 사건에 대한 북한 담론과 북한선교의 실천적 방향’이라는 주제로 발제한 하광민 총신대학교 통일개발대학원 주임교수는 “북한의 셔먼 호 사건 담론은 단순한 역사 해석을 넘어 체제 유지와 정당성 강화를 위한 선전 체계로 구조화돼 있다. 제너럴 셔먼 호는 북한에서 ‘미제 침략선’ 혹은 ‘무장 해적선’으로 규정되며, 사건의 핵심은 조선 인민의 자주적 항쟁으로 재구성된다. 특히 김응우를 격침의 주역으로 부각시켜 ‘백두혈통’의 정통성을 역사적으로 뒷받침하는 서사가 형성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반면 토마스 선교사는 ‘토마스놈’ 등으로 비하되거나 주변화되며, 선교사로서의 정체성은 철저히 배제된다. 이러한 서사는 『조선전사』, 『조선근대사』, 『민족해방투쟁사』 등 공식 역사서와 교육과정, 선전 매체를 통해 40년 이상 일관되게 유지되면서 반미·반기독교 이데올로기를 내면화시키는 다층적 재생산 구조를 갖는다”고 전했다.

하 교수는 이러한 담론의 내면화 정도를 파악하기 위해 탈북민 78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응답자의 약 80%가 학교 교육을 통해 셔먼 호 사건을 접했고, 김응우 영웅 서사를 학습한 비율도 높게 나타났다. 반면 토마스 선교사의 존재를 인지한 비율은 낮아서, 북한 교육에서 그의 존재가 의도적으로 축소·배제됐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 교수는 “다만 남한 정착 이후 90% 이상이 기독교에 대해 긍정적으로 인식이 변화한 점은 ‘탈내재화’ 가능성을 보여준다”며 “동시에 수령 우상화, 체제 통제, 반기독교 교육이 주요 장애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어, 단순한 교리 전달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시사한다”고 설명했다.

하 교수는 이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북한의 왜곡된 역사 서사에 대응하는 ‘대항 서사’ 구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토마스 선교사를 한국교회의 ‘씨앗 서사’로 재해석하고, 탈북민을 선교의 주체로 세우는 전략이 중요하다”고 했다. 아울러 “북한 주민들이 이미 내면화한 역사 인식을 고려할 때, 복음은 단순한 신앙 메시지가 아니라 역사 이해의 재구성과 함께 전달돼야 한다. 무엇보다 수령 신격화를 대체할 수 있는 신앙적·공동체적 구조를 제시하는 것이 핵심 과제”라고 했다. 하 교수는 마지막으로 “북한의 반기독교 담론은 강력한 선전 체계이지만, 탈내재화의 가능성이 확인된 만큼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접근을 통해 변화할 수 있다”고 했다.

토마스 순교, 해안→내륙 중심 선교 확장 전환점
한국교회의 형성의 출발을 알리는 역사적 사건

▲유해석 교수. ⓒ강혜진 기자

▲유해석 교수. ⓒ강혜진 기자

‘토마스 선교사의 내륙 선교관: 19세기 중후반 내륙 선교 전략의 맥락에서’라는 주제로 발제한 유해석 총신대 부설 교회선교연구소장은 토마스 선교사의 내한과 순교를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분명한 선교 신학과 전략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 소장은 “토마스 선교사는 아버지 로버트 토마스 목사의 신앙적 유산과 헌신적 삶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러한 배경 속에서 철저한 세계관과 선교관을 형성했다”고 전했다. 그에 따르면, 토마스 사후 2년 뒤 웨일즈 회중교회 연감에 ‘복음을 위해 죽은 인물’로 기록돼 있으며, 이는 그의 죽음이 동시대에도 신앙적 의미로 해석됐음을 보여준다.

그는 “그러나 이후 일제강점기, 특히 미나미 지로 시기부터 토마스와 제너럴 셔먼 호 사건은 미제 침략 서사의 도구로 왜곡됐고, 해방 이후 북한에서도 반미·반기독교 선전의 핵심 소재로 재구성됐다”며 “신뢰할 수 없는 사료 의존, 초기 교회의 과도한 영웅화, 그리고 식민지 및 냉전 체제 속 이데올로기적 해석 등이 이러한 왜곡의 원인이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특히 박규수의 장계와 토마스가 남긴 서신 등 1차 사료 등을 통해 토마스가 제너럴 셔먼 호의 책임자나 결정권자가 아니었으며, 단지 선교적 목적을 가지고 동승한 인물이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 또한 “‘제너럴 셔먼 호’가 군함선 ‘프린세스 로열 호’와 동일 선박이라는 주장도 연대 차이와 선박 등에서 큰 차이가 드러났다. 실제로 제너럴 셔먼 호는 중국 상비군 헨리 안드레스 버빈의 배였다는 기록이 있다”고 했다.

유 교수는 “무엇보다 토마스 선교사는 ‘내륙 선교의 선구자’였다. 당시 대부분의 선교가 해안 거점에 머물렀던 것과 달리, 그는 위험을 감수하고 미전도 지역인 조선 내륙으로 들어갔다. 이는 단순한 개인적 열정이 아니라 회중교회 전통, 언어 능력, 선교 비전에 기반한 전략적 선택이었다”고 했다. 아울러 “최후의 순간에도 성경을 전하려 했다는 증언은 그의 선교적 정체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그의 죽음은 실패가 아니라, 해안 중심 선교에서 내륙 선교로 확장되는 전환점이자 한국교회 형성의 출발을 알리는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될 수 있다”고 했다.

한편 총회 토마스선교사기념관설립위원회(위원장 태준호 장로)는 인천광역시 옹진군 백령면 두무진에 총 29억 원 규모의 기념관 부지를 매입하고, 지난 2월 26일 기공감사예배 및 기공식을 진행했다.

위원장 태준호 장로는 “토마스선교사기념관은 한국교회를 영적으로 회복시키고 선교 열정을 일깨우는 상징적 공간이 될 것”이라며 “한국교회 선교의 출발점을 바로 세우는 뜻깊은 사역에 교단 산하 1만 2천 교회와 230만 성도들이 먼저 동역해 주길 바란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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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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