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

“지구촌 자살률 1위, 기독교 사랑 공동체가 유일한 대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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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나비 논평 발표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 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크리스천투데이 DB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 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크리스천투데이 DB

‘샬롬을 꿈꾸는 나비행동’(상임대표 김영한 박사, 이하 샬롬나비)이 대한민국이 20년째 OECD 자살률 1위라는 오명을 씻지 못하는 상황과 관련해 세상 학문의 한계를 지적하고, 기독교적 사랑 공동체만이 진정한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샬롬나비는 23일 논평에서 “K-팝과 방탄소년단(BTS)이 글로벌 인기를 누리며 세계의 이목이 서울에 집중되고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삶을 포기하는 자살자가 속출하는 역설적 상황에 처해 있다”며 “2024년 자살 사망자 수가 2011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하고 매일 39.5명이 극단적 선택을 하는 현 실태는 우리 사회의 불행한 단면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세상 학문의 한계에 대해 “철학적 시도는 자살의 원인 규명이나 해결책 제시에 있어 사실상 전무하며, 심리학 역시 풍성한 연구 자료에 비해 실질적인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며 “현대인은 속도전에 밀리지 않기 위해 자기를 잃고 비참한 상태에 빠지며, 문명화될수록 자살자가 늘어나는 양상을 보인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이 근대 과학문명으로 하나님을 대체한 우상숭배의 결과”라고 지적했다.

샬롬나비는 “성경은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품에 머무는 법을 가르친다. 인생의 결핍과 실패의 위기가 찾아올 때 삶을 지탱하는 것은 풍부한 내적 자원이며, 이는 사랑받았던 경험과 신앙에서 비롯된다”며 “요셉이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현실에 충실했던 것처럼, 현대인들도 현실과 꿈의 간극을 도박이나 베팅으로 해결하려 하기보다 한계 안에서 감사하는 삶을 회복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특히 공동체의 역할을 강조하며 “무제한적 욕망이 인간을 원자화시키고 가족 공동체를 해체해 왔으나, 신앙 공동체는 말씀을 몸으로 살아내며 풍부한 내적 자원을 공급한다”며 “교회 공동체가 살아 있고 제대로 기능하는 길만이 자살을 예방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단언했다.

끝으로 샬롬나비는 한국교회의 책임을 당부하며 “한국 기독교는 공감이라는 이웃 사랑의 메시지로 삶의 현장에서 소외된 이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무한 경쟁 속에서 관용과 용서, 화목이라는 사랑의 윤리를 강조하며 우리 사회를 ‘사랑방 공동체’로 만들어가는 데 앞장서야 한다”고 덧붙였다. 다음은 논평 전문.

지구촌 자살률 1위에 대한 기독교 대안

철학과 심리학, 사회학 같은 세상 학문의 원인분석만으로는 자살의 해결책을 찾아낼 수 없다
경쟁이 치열하고 삶의 의미를 찾기 어려운 현대 사회에서 공감(이웃 사랑) 메시지를 전하는 사랑 공동체 기독교만이 자살을 막을 수 있다

  게데헌, 글로벌 K 팝 스타 방탄소년단(BTS) 콘서트 등 케이팝(K-pop)이 글로벌 인기를 누리고 있는 가운데 대한민국 국민의 자살자의 수가 가파롭게 증가하는 중이다. OECD국가 중에 자살률 1위라는 오명은 20년 이상 유지되고 있다. 자살 예방책이라는 것이 아파트 옥상 문을 잠궈야 한다는 등의 궁색한 대책이 회자되고 있는 실정은 아직도 자살에 대한 심각성이 전혀 고려되지 않거나 방기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1년에 자살로 사라지는 인구는 대한민국에서 작은 도시나 읍이 사라지고 있는 셈이다. 2023년 자살사망자 수는 13,978명으로 2022년 대비 1,072명(8.3%) 증가하였고, 2024년도 자살사망자 수는 14,872명으로 2011년 이후 가장 높은 수치이고, 男이 女보다 2배 많으며, 50대가 최다이고 40∼50대가 전체의 40%이며, 매일 39.5명이 자살하고 있는 심각한 상황이다.
2026년 3월 21일 전 세계 아미(ARMY,BTS 팬클럽) 젊은이들에게 삶을 즐기는 맛과 문화를 제공하여 글로벌 팬들이 BTS 컴백 라이브: 아리랑 콘서트(오후 8시)를 보러 서울에 집결하고 이 공연은 글로벌 스트리밍 플랫폼 넷플릭스(Netflix)를 통해 전 세계 190여 국에 동시 생중계되었다.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어 서울 광화문은 세계의 중심이 되었다. 이런 가운데 대한민국의 다른 한편으로는 삶에서 낙오하고 삶을 포기하는 자살자들이 글로벌 으뜸이라는 우리 사회의 불행한 사실은 우리 문화의 역설적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 샬롬나비는 이러한 심각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자살에 대한 기독교의 대책을 아래와 같이 표명하고자 한다.

1. 철학에서는 자살에 대한 원인규명은 물론,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
인간은 역사이래, 수많은 전쟁을 치루면서 서로를 죽이고 살해해 왔다. 이데올로기가 다르다는 이유로 또는 상대를 죽여야 살아남는 구조에서 자기보존 욕구는 정당한 것으로 인정된다.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전쟁에 대한 이러한 보도를 우리는 무심히 바라보며 식사를 할 수 있다. 전쟁을 통해 상대를 공격해야 하는 것은 어느 정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상대를 공격하며 얼마만큼의 민간인과 군인들이 죽었는지, 뉴스를 통해 보도 되지만 파괴성이 자기에게로 향하는 자살이란 이 특이한 문제에 대해서, 특별한 사람의 자살 외에는 언급을 회피하거나 뉴스보도를 꺼린다. 자살에 대한 연구자체도 만만치 않는 분야이지만 자살의 터부 때문에 사회학자나 심리학자를 제외하고 자살을 지성의 영역으로 데려오려는 철학적 시도는 사실 거의 전무하다 할 수 있다.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M. Heideggr, 1889-1976)는 죽음을 두려워 하거나 직면하려하지 않는 자의 삶을 세인(世人)의 삶으로 규정한다. 그는 죽음 앞으로 미리 달려가 죽음을 떠맡고 죽음을 자신 것으로 만드는 삶의 가능성으로 죽음을 이해한다. 이와 달리 샤르트르(J. P. Sartre, 1905-1980)는 죽음이 객관적 사실이기는 하지만 어차피 죽어보기 전에는 경험할 수 없는 것이어서, 삶의 자리로 들어올 수 없는 무의미한 것으로 파악한다. 자살은 일종의 죽음이기는 하지만 삶의 가능성에서 도망가는 세인의 삶도 아니고, 죽음을 무의미화하는 것도 아니다. 더욱이 철학이 없어서 죽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철학적이어서 자살할 수도 있는 역설이 있다. 이런 점에서 철학으로는 자살에 대한 원인이 규명되지 않는다. 자살의 성공은 그것이 외부환경의 영향이든, 내부 심리적인 것이든 죽음이 피난처가 될 만큼 현실의 삶이 고통스럽고 처절했다는 의미다. 살려고 하는 의지가 맹목적이고, 비록 세인의 모습일지라도 사람들은 죽음을 아직 아님으로, 후일로 연기(延期) 하며 사는 일에 익숙하고 이러한 회피적 삶의 태도는 죽음이 얼마나 큰 외상인가를 역설적으로 반증한다. 4세기 사상가요 교부인 어거스틴은 인간은 자신이 비참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세상에서 사라지기를 바라지 않으며, 죽음으로써 불행을 끝내려 하기보다 불행 속에서라도 이 세상에 살고 싶어한다고 말한다.(신국론 1부 11권 27장) 자살에서 논리적인 철학적 문제 제기를 기대하기에는 어렵다. 자살은 일반적 죽음에 대한 뒤틀림이고 왜곡된 병리라 말할 수 있다. 죽음을 피난처로 삼을 만큼 죽음에 매혹되는 이 병의 원인은 무엇일까?

2. 심리학에서는 자살에 대한 원인규명은 가능하지만 대책을 제시하지 못한다.
프로이트의 삶의 본능뿐 아니라 죽음본능이라는 파괴본능을 언급했지만 당시 유럽에 자살자들이 많아 더 이상 연구를 개진하지는 못했다. 자살은 ‘삶의 본능’과 ‘죽음 본능’의 균형이 깨져 죽음본능이 우세한 결과에 기인된다. 사실 자살자가 끊이지 않는 현상은 프로이트의 죽음본능의 존재가 허구가 아니라는 것은 논증한다. 인간 안에 이러한 악한 파괴성이 있다는 그의 발견은 심리학 분야에 엄청난 통찰과 발전에 기초가 되는 유산이 되었다. 프로이트의 파괴본능을 깊게 파고 들어간 멜라니 클라인은 <시기심과 감사>에서 타자의 선함을 해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자기공격에 대한 연구를 감행했다.
그러나 심리학은 이 모든 풍성한 연구자료에 비해 해결책이 미미한 이유는 인간이 받은 상처나 상실을 다시 불러오거나 과거로 퇴행하는 일이 쉽지 않고 무엇보다 치료 경비 또는 믿을 수 있는 전문가와의 만남이 조화롭게 이루어진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에 있다. 때문에 여전히 당면한 자신의 파국을 가장 빨리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극단적 선택이다. 자살은 여전히 허약한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매력이요 실타레처럼 꼬여 있는 이 세상의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고 도망가는 최고의 해결책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자살은 막다른 골목에서의 돌파구가 된다.
분명한 것은 심리적으로, 현실과 이상의 간극이 너무 커 그것을 메꾸거나 멜꿀 수 있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 간극이 틈새가 되고 절벽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에는 그 간극이 공간이 되고 창조적 놀이터가 된다. 이 놀이터는 오히려 우리가 어려움을 겪을 때, 우리의 마음을 달래거나 승화시킬 수 있는 중간 매개가 된다. 매개와 승화는 감각적 존재 형태가 정신화 될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근대화의 물질문명, 그리고 마르크시즘(marxism)에 완전한 성공을 거둔 자유시장경제의 난점은 물질과 감각에 모든 리비도가 과잉투자된다는 것이다. 이때 감각은 내면의 공허와 텅빔을 감싸고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하지만 그 방어가 항상 유효한 것은 아니다. 방어막에 구멍이 뚫리면 쏟아지고 떨어지는 파국적 불안에 그대로 노출될 것이고(J,Mitrani) 이것에 대한 직면을 미루는 방법으로, 여러 가지 감각적 자극에 더욱 몰두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 방어막은 다시 뚫려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한계 상황과 맞닥뜨리게 된다. 이때, 아무것도 아님이라는 무에 대한 인식은 그를 무중력의 상태로 몰고 갈 것이고 증발할 것 같은 존재의 가벼움과 향방없음은 다시 거짓승리의 조적방어로 몰고갈 것이다. 자살이 울중보다 조증에서 더 많이 일어나는 이유이다.
그러나 자살에 대한 이러한 심리적 분석이 자살에 대한 원인규명을 모두 밝힐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E. Durkheim)은 그의 <자살론>에서 정신병과 무관한 자살이 전체 자살의 일부를 구성하는데 지나지 않아 일반적인 자살의 집합적 경향을 설명하는데 아무런 단서도 제공해 주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정신적 소외와 완벽하게 균형을 이룬 지성 사이에는 수 많은 중간적 단계들, 사회적 요인과 비사회적 요인들이 있기때문이라고 말한다.

3. 자살의 심리적 요인은 현대문명의 영향과도 일부 일치한다
자살의 심리적 요인은 현대과학 문명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현대인의 삶의 모습에서도 일치되고 있다. 현대인은 속도전에 밀리지 않기 위해 패스트 푸드를 먹고 카페인이 든 커피로 수면시간까지 줄여가며 더 빨리, 더 많은 일을 처리해야한다. 더 개발해야 하고 더 업그레이드 하지 않으면 도태된다. 때문에 더 빨리 보고, 더 빨리 배우고, 더 빨리 행동에 옮겨 더 많은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 덕분에 직장에서도 더 빨리 은퇴하라고 재촉당한다. 빠름으로 달려가면 갈수록 우리의 삶이 여유로와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빨리 달리라고 채찍질 당한다. 그렇게 악순환에 빠지면 삶이 각박해지고 결국 자기를 잃고 일상은 죽지 못해 사는 그런 비참한 상태에 빠진다. 긴장을 풀려면 억지로 알코올을 몸에 넣어야 하고 이로 인해 몸이 망가지는 악순환에 빠진다. 무언가 이룬 것 같은데 삶의 질은 여전히 낮은 것이다.
과거 수렵시대 사람들은 먹을 것을 구하려면 창을 들고 몸으로 뛰고 또 같이 협동해야 사냥감을 얻을 수 있었다. 때문에 그들의 삶에서 피상적인 관계라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언어 또는 사회조직의 상징계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은 글이나 숫자로 모든 것을 대체한다. 이것과 반대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노동자들이다. 이들은 비록 삶을 불평하고 자신들의 처지를 비관할 수는 있지만 적어도 자신의 삶에 가짜라는 느낌은 없다. 이들의 삶은 버겁지만, 그만큼 삶은 현실적이고 생생하다. 이들은 자살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식을 하고 거대한 금융시스템의 체계와 수치에 매몰된 사람들은 모든 것이 상상과 사이버 스크린 안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게임이 된다. 이들이 돈을 벌고 성공을 해도 삶이 생생하지 않고 허망하게 느껴진다. 기계와 AI, 그리고 쳇GTP로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몸으로 힘든 일을 감당하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 된다. 문명화될수록 자살자가 늘어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렇게 심리학과 현대문명에 대한 분석으로 자살의 원인규명이 되지만 대책은 전무하다.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이 이성에 기반한 근대 과학문명으로 하나님을 대체한 우상숭배의 결과이다.

4. 기독교만이 자살에 올바른 원인규명(인간 한계 인정)과 대책(하나님의 품, 사랑의 공동체)을 동시에 제시해준다.
노예 요셉과, 애굽의 총리의 요셉의 간극은 크다. 그러나 그는 노예의 자리에서는 노예로, 보디발 대장 집에서는 집사로, 죄수의 자리에서는 죄수로 충실했다. 그는 늘 한계 안에 머물렀다. 그가 애굽의 총리를 꿈꾼 것은 아니었지만 그 자리에 어느날 올라가 있었다. 그가 한 일은 하나님 앞에서 현실을 충실하게 사는 것이었다. 현대인은 현실과 꿈의 갭을 일거에 해결하려니 베팅할 수밖에 없고 결국 도박을 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미치지 못할 기인한 일에 힘쓰지 말라고 한다.(시131:1)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한다(살전5:18) 성경은 인간은 구름위에 떠서 살 수 없는 존재라고 말한다.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라고 말씀한다. 인간은 의존적인 존재이다. 요셉은 고난을 당했을 때, 지능이나 숫자로 견디어 낸 것이 아니라 내적 자원으로 견디어 냈다. 그에게 내적 자원이란 무엇인가? 사랑받았던 경험 또는 아버지의 삶에서 물려받았던 신앙이었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결핍과 상실, 버림받음과 실패의 위기들이 찾아오게 되어 있다. 위기라는 것은 외적 자원이 일시, 고갈되는 것으로, 돈이 없거나 몸이 아플 때 찾아온다. 이때, 일시 인간은 그의 내면세계에 의지해야 한다. 풍부한 내적자원이 삶을 지탱하는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신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다. 모든 일에는, 연단의 시간, 기다림의 시간, 그 상태로 머물러 있는, 또는 엄마의 품(하나님의 품)에 머물러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누군가에게는 살아낸다는 것이 마냥 어렵기만 하지만 누구는 삶을 그냥 살아낸다. 그러나 그냥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축적(蓄積)된 내적 자원으로 살아내는 것이다. 어려움의 시기에 무언가 떠 올려야 하는데 그럴 만한 것이 없다면 마약을 하거나, 알콜 중독 또는 도박의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결국 막다른 길에 이르게 되고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근대 과학문명을 이용한 인간의 무제한적 욕망은 인간을 원자화시키고 가족공동체를 해체시켜 왔다. 이해공동체에서의 경쟁은 승자만 살아남는 구조다. 신앙 공동체는 말씀을 삶으로 몸으로 살아내는 공동체이다. 사랑의 말씀이 우리의 심비(心碑)에 그리고 우리의 몸에 삶으로 기록되어질 때 그것은 내적 자원이 될 것이고 이러한 내적자원이 풍부한 사람은 상실과 실패의 순간에 약속의 소망을 제공하는 이미지를 내부에 간직하게 될 것이다. 교회공동체가 살아 있고 제대로 기능하는 길만이 자살을 예방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5. 오늘날 OECD 국가 중 자살률이 가장 높은 한국사회에 대한 한국교회의 책임은 막중하다. 삶을 포기한 이웃에게 공감과 사랑공동체로 다가가야 한다.
지난 주말 광화문에서는 전례없는 BTS(방탄소년단) 공연으로 인해 전 국민들, 특히 청소년들과 여러 나라 외국인 청소년들 등 26만명 관객들이 모여 한국의 K 팝 공연을 즐기고 삶을 향유하였다. 이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란 전쟁 소식으로 겁과 두려움에 질린 지구촌 사람들에게 즐거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K-문화예술을 즐기면서 삶의 의욕을 다짐하는 한국 문화 속에서 삶을 포기하는 자살자가 세계에서 으뜸이라는 사실은 한국문화가 갖는 역설적 측면이다. 한국 사회는 우리 청소년과 한국인들이 사랑방 공동체 삶을 발견하도록 하는데 그 해결책을 찾아야 할 것이다. 한국기독교는 복음의 메시지(공감이라는 이웃 사랑)로써 삶의 현장에서 유리되고 있는 주변 이웃에게 다가가야 할 것이다. 기독교는 경쟁 사회의 무한 대립 속에서 관용과 용서와 화목이라는 사랑과 긍휼이라는 상생과 공생의 삶의 윤리를 강조한다. 이 윤리는 사회를 사랑방 공동체로 만들어가는 데서 형성된다.

2026년 3월 23일
샬롬을 꿈꾸는 나비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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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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