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

“강단에서 정치 이야기 하지 말라, 한국이 기독교 국가인가?”에 응답한다

15px
  • <!–

  • –>

[기고] 시대적 분별과 선지자적 사명 회복을 바라며

▲칼럼 관련 이미지. ⓒ안상렬 목사 제공

▲칼럼 관련 이미지. ⓒ안상렬 목사 제공

최근 한 동료 목사님이 은퇴한 신대원 교수님으로부터 들었다는 충고를 전해 주었습니다. “강단에서 정치 이야기를 하지 말고, 말씀만 전하라.” “우리나라는 기독교 국가도 아닌데 기독교적 가치관을 법안에 반영하려 하는 것이 옳으냐?”

겉으로 보면 이는 세속 국가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합리적 시민의식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면에는 복음의 전 영역성과 개혁주의 신앙의 정수, 그리고 대한민국 건국 역사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결여돼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신학적 견해 차이가 아니라, 시대를 오판한 영적 분별의 문제입니다.

침묵은 중립이 아니라 파수꾼의 직무유기입니다

성경 속 선지자들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 사명의 강조점이 달랐습니다. 신앙이 국가의 근간이던 왕국 시대 선지자들은 권력의 부도덕을 향해 날선 하나님의 법을 선포했습니다. 나단과 엘리야 선지자는 왕 앞에서조차 하나님의 공의를 담대히 선언했습니다.

반면 나라를 잃은 포로 시대 선지자들은 절망에 빠진 백성을 위로하고 회복의 소망을 전했습니다. 다니엘이나 에스겔 선지자의 사역에는 이러한 특징이 분명히 나타납니다.

문제는 우리가 아직 회개와 개혁이 필요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나라가 무너진 포로 시대처럼 행동하려 할 때 발생합니다.

네덜란드 신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아브라함 카이퍼는 “우리 삶의 모든 영역 가운데 만유의 주재이신 그리스도께서 ‘내 것이다!’라고 외치지 않으실 영역은 단 1인치도 없다”고 역설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공공성(Publicness)입니다.

복음은 교회 안에만 머무는 사적 위로가 아니라, 정치·경제·사회·문화·종교·예술·국방 등 모든 공적 영역 위에 하나님의 통치가 미쳐야 한다는 선포입니다. 우리가 ‘포로 시대의 위로’에만 안주하여 침묵한다면, 결국 나라가 완전히 무너진 뒤에야 뒤늦은 비극적 위로를 전하게 될 것입니다.

자유 대한민국, 기독교적 토대 위에 세워졌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대한민국 헌법 제20조 2항의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는 조항을 들어, 교회의 공적 목소리를 부정합니다. 그러나 이는 정교분리 원칙에 대한 몰역사적 해석입니다.

미국 건국 역사를 보면,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왔으나,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은 강요가 아닌 자유 속에서 깃들며, 기독교는 진리이기에, 자유만 보장된다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자유와 진리에 대한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믿음 위에서 미국 수정헌법 제1조는 말합니다. “연방 의회는 국교를 정하거나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금지하는 법률을 제정할 수 없다.” 즉 정교분리(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의 본질은 국가가 교회를 탄압하거나 간섭하지 못하게 하는 ‘보호의 장벽’이지, 교회의 양심적 목소리를 막는 ‘침묵의 재갈’이 아닙니다.

대한민국 건국 정신 역시 이와 궤를 같이합니다. 선교사들이 심은 복음의 씨앗은 이 땅에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일깨웠고, 한성감옥에 갇혔던 청년 이승만에게 ‘기독교 입국론’의 꿈을 심었습니다. 3.1운동 민족대표 33명 중 16명이 기독교 지도자였고, 독립운동으로 투옥된 인원의 20%가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리고 1948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주도로 대한민국을 건국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기초가 된 제헌국회가 이윤영 의원의 기도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이 나라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또 우리나라 헌법 제20조와 제21조는 미국 수정헌법 제1조를 사실상 둘로 나눈 것인데, 제20조(종교의 자유)를 제21조(언론·출판의 자유)보다 앞서 선언함으로 종교와 양심의 자유가 모든 시민적 자유의 모태임을 천명했습니다.

교회의 공적 목소리는 권력을 탐해서가 아니라, 성도들이 하나님을 자유롭게 예배할 수 있는 ‘신앙의 생태계(Ecological environment of faith)’를 지키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애국가 가사처럼, 이 나라의 기초는 기독교 위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처럼,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힘쓰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당연한 책무입니다.

세상을 향한 선지자의 권위, ‘파카드(פָּקַד)’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부르실 때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웠다(예레미야 1:10)”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세우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파카드(פָּקַד)’는 단순히 자리를 차지하게 한다는 뜻이 아니라, 공적 사명을 맡기고 감독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선지자의 메시지는 세상 권력 아래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으로 세상을 감찰하고 교정하는 권위를 지닙니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기독교 강요』 제4권 20장에서 국가 위정자를 ‘하나님의 대리자’로 설명했습니다. 이는 위정자가 국가의 주인이라는 뜻이 아니라, 도리어 그가 하나님 앞에서 공의를 실현해야 할 엄중한 사역자임을 선언한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위정자가 그 신성한 직무를 온전히 수행하는지, 하나님의 법으로 감찰하고 교정해야 할 사명을 갖게 됩니다. 정치가 하나님의 정의 앞에 바로 서도록 외치는 일은 정치를 이용하려는 야욕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최고의 사랑이자 사명입니다.

결론: 21세기 영지주의를 넘어, 사명을 회복합시다

결국 ‘우리나라가 기독교 국가인가?’라는 질문은 교회의 책임을 약화시키는 논리일 뿐입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서 있는가?’라고 물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정치와 사회를 ‘속된 영역’으로 여겨 외면한다면, 그것은 복음을 사적 영역에 가둬 버리는 21세기 영지주의에 불과합니다. 선지자의 지팡이는 성소 안에만 머물지 않고 왕궁과 거리, 그리고 입법의 현장까지 뻗어나가 하나님의 정의를 외쳐야 합니다. 아직 기회가 있을 때에 파수꾼의 나팔을 불어야 합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회복해야 할 것은 ‘정치적 중립’이라는 이름의 비겁한 침묵이 아닙니다. 오직 말씀 위에 서서 시대를 깨우는 파수꾼으로 서는 것, 그것이 우리가 다시 붙들어야 할 선지자적 용기입니다.

스스로 포로의 길을 자처하지 맙시다. 복음의 전 영역성을 선포합시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부끄럼 없는 목회자, 사람 앞에 당당한 순교자적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안상렬 목사(부산 세계로교회)

<저작권자 ⓒ ‘종교 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구독신청

📰 출처: 크리스천투데이

광고영역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광고영역

광고영역

광고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