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적 인성 강의 중 한 목사님이 질문을 하셨다.
“한국교회 복음의 초기에는 목사님,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들이 동네에서 신뢰받고 존경을 받았는데, 오늘날은 오히려 그렇지 못한 상황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에 대해 궁색한 답변일지 모르지만, 나는 이렇게 대답한 적이 있다.
“초기 당시 국내 상황에서는 유교적 삼강오륜(三綱五倫)이 사회 저변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기에 인성 문제가 크게 대두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유교적 세대가 지나가고 복음만 전파되다 보니 복음과 삶 사이의 간극이 커졌다고 봅니다.”
복음은 완전하여 더하거나 덜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사람은 양면적인 존재이기에 자칫 복음을 ‘따로 국밥’처럼 분리된 방식으로 활용할 위험이 있다. 복음을 일치성으로 받아들이고 항상성으로 생활화하기에는 인간적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복음은 완전하지만, 복음과 삶이 하나 되는 복음적 인성 훈련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문화·사회적 측면에서 본다면, 문제는 복음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이중적 본성이다. 영어권에서 사람을 person이라 부르는데, 이는 라틴어 persona(가면)에서 파생된 단어다. 본래 인간은 이중성을 가진 존재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인간의 양면성을 단순히 존재(Being)의 문제로만 보지 않고, 일치적 행위(Doing)의 과제로 접근해야 한다.
인성 문제를 행위적 과제로 풀어낼 때, 자각 능력·분별 능력·공감 능력·조절 능력·실천 능력으로 나눌 수 있다. 인간의 양면적 본성을 일치성으로 추구하는 자기 인성적 거듭남이 필요하며, 불완전한 인간에게는 일회성이 아닌 항상성으로 이어지는 훈련이 더욱 소중하다.
상담학자 칼 로저스는 인성 태도를 무조건적 긍정적 수용(Unconditional Positive Regard), 객관적 공감(Empathy), 일치성(Congruency), 따뜻함(Warmth) 등 4가지로 강조했다.
이러한 태도가 믿는 자 안에 정착되려면 특별한 성령의 역사와 기대가 필요하다. 결국 삶의 주권 자리에서 내가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주하시어 나를 자기 조절(Control Tower)과 지휘소(Command Post)로 다스리실 수 있도록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관건이다.
더 나아가 AI 시대를 맞아, 완전한 복음이 인간 본성에 적용될 수 있는 새로운 플랫폼이 요구된다. 이는 복음과 무관한 인본적 인성 개혁이 아니라, 복음적 인성 개혁으로서 교회와 목회자, 가정과 사회, 경건과 과학에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를 역사적 사명으로 고민해야 한다.
📰 출처: 크리스천투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