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국제대 이금석 교수님의 ‘평양신학교와 미국 북장로교’를 매주 수요일 온라인 연재합니다. 교수님은 최근 동명의 논문을 출간했습니다. -편집자 주
美 장로교회, 1810년대 선교 관심
남북전쟁 후 북장로교-남장로교로
북장로교, 1907년까지 81명 파송
한국 장로교와 평양신학교 큰 영향
2)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의 선교정책
(1)미국 북장로교의 한국 선교 배경과 초기 과정(계속)
유럽 교회들 또한 한국 선교에는 부적절한 대상이었는데, 식민지 확장과 선교를 병행했기 때문이다.
미국 장로교 선교부는 이수정의 요청을 받아들여, 1884년 9월에 조선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정했다. 미국 장로교회는 남북전쟁 이후 남북으로 갈라져 소위 북장로교회와 남장로교회라는 명칭으로 행정을 달리하기까지, 하나의 장로교회로 발전해 왔다.
1796년 장로교인들이 뉴욕선교회(The New York Missionary Society)라는 독립 선교단체를 조직했는데, 장로교회의 통제를 받지는 않았다. 1800년 장로회 총회는 비로소 선교 사업에 착수해 사업기금을 모집했고, 1818년 연합외국선교회가 조직될 때까지 아메리카 인디언 선교 사업을 계속 하고 있었다.
미국 장로교회가 외국 선교에 적극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810년 미국회중교회에 의해 설립된 미국외지선교재단(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의 출현이 계기였다. 미국 장로교선교재단은 총회의 지휘를 받았다.
1837년 신학파(New School)와 구학파(Old School)로 분열됐지만, 선교 사업에 더 열심을 낸 것은 구학파(Old School)였다. 구학파(Old School)는 해외선교부를 설치해 시암(1840), 중국(1843), 콜롬비아(1853), 일본(1859), 멕시코(1872)에 선교사를 파송했다.
1870년부터 1899년까지 미국 북장로교와 남장로교는 제각기 성장하고 있었다. 선교 행정 실무는 주로 총무가 관장했으며, 해외 선교는 무디의 부흥 사역으로 더욱 활발하게 진행됐다.
북미에서 일어난 장로교 선교운동은 한국 장로교 선교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고, 당시 영국과 미국에서 일어난 부흥운동과 해외 선교운동에 많은 영향을 받게 됐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의 선조들은 상당수가 스코틀랜드 및 아일랜드 장로교 출신이었다. 그들의 신학 사상은 청교도 신학, 부흥, 선교 정신이었다.
미국 북장로교의 한국 선교 입국은 1884년 9월 20일 중국에서 북장로교 선교사로 활동하던 호러스 알렌(Horace Newton Allen)의 입국으로 시작된다. 호러스 알렌은 1858년 4월 23일 미국 오하이오주 델라웨어에서 출생했다.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출생하고 성장한 알렌은 1881년 오하이오주 웨슬리언대학교 신학부를 졸업하고 마이애미 의과대학에 진학해 1883년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비록 알렌보다 7개월 늦게 한국에 입국(1885. 4. 5)했지만,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1859-1916)는 한국 개신교의 개척 선교사라고 할 수 있다.
북장로교는 이들부터 1907년 8월 30일 로버트(S. L. Roberts) 부부에 이르기까지, 23년간 총 81명을 파송했다. 미국 선교사들 가운데 북장로교는 가장 많은 선교사를 한국에 파송한 곳이었고, 그만큼 한국 장로교와 평양신학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한국 파송된 선교사들, 세계적으로
탁월, 신학적 건전, 언어에도 재능
주로 20대라 선교 경험은 부족해
경험 풍부 선교사 필요성 느껴 기도
네비우스 초청, 그 이론 기초 삼아
자립·자치·자전 원칙, 핵심은 성경
한국교회 선교와 성장 크게 기여해
(2) 미국 북장로교의 한국 선교 정책
① 네비우스 선교 정책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 총무 아서 브라운 박사가 지적한 것처럼, 초기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세계적으로 탁월했고, 신학적으로도 개혁주의 청교도 신앙의 건전하고 경건한 선교사들이었다. 이들은 젊었고 열정이 있었으며, 언어적으로도 뛰어난 재능이 있어 한국어도 빨리 습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20대의 젊은 선교사들이었기 때문에 선교 경험이 부족했다. 그래서 경험이 부족한 초기 선교사들은 경험이 풍부한 선교사들을 파송해 달라고 기도했다. 먼저 파송받은 그들은 선교 경험이 풍부한 선교사가 입국해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기를 바랐다.
그러던 중 중국에서 활동하던 존 리빙스턴 네비우스(John Livingston Nevius, 1829-1893) 선교사가 풍부한 선교 경험을 이론적으로 정리했다는 소식을 듣고, 1890년 6월 북장로교 선교사들 7명을 중심으로 그를 초청했다.
네비우스는 1829년 3월 4일 뉴저지에서 태어났고, 유니언대학교를 졸업하고 프린스턴신학교에 진학해 3년간 신학 교육을 받았다. 그는 장로교 해외선교부로부터 선교사로 임명받고, 처음 중국 영파에서 7년간 사역한 후 산둥성으로 거점을 옮겨 사역하면서 자신의 선교 경험을 이론으로 정립했다.
네비우스 박사는 1895년 상하이 「차이니즈 레코더」에서 자신의 정책에 관한 글을 출간했다. 네비우스의 선교 정책은 먼저 그의 청교도 신학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증거는 네비우스가 “실제적 종교를 다룬 청교도들의 작품인 리처드 백스터의 『성도의 안식』과 필립 도드르지의 『영혼의 일어남과 회심 과정』, 그리고 존 플라벨의 작품들을 성경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긴다”고 한 말에 있다.
네비우스 선교 정책은 그의 독창적인 작품이라기보다, 헨리 벤(Henry Venn)과 루퍼스 앤더슨(Rufus Anderson)의 선교 이론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다. 둘의 ‘삼자 원리(Th ree-self formula)’는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근간과 유사한 것이 많았다.
네비우스 선교 이론은 이들의 이론을 아시아 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주한 장로교 선교부는 1891년 7단 60조로 된 북장로교 선교회 규칙을 선교부 규칙과 내규로 정해 선교 정책의 기초로 삼았다.
선교사들은 네비우스 선교 방법을 당시 조선의 상황과 현실에 따라 적용했다. 당시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누구나 도착한 후 네비우스 선교 정책에 대한 책을 받았다. 첫해 말에는 언어에 대한 시험을 합격해야 함과 동시에, 네비우스 원리를 완전히 터득했음을 보여줘야 했다. 이는 입국하는 모든 장로교 선교사들에게 요구되는 필수 사항이 되었다.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 총무인 스피어(Robert E. Speer)는 네비우스 선교 방법론이 한국 선교 정책에 깊이 뿌리내릴 것으로 예측했다.
네비우스 정책의 핵심은 자립이다. 네비우스 원리를 통상적으로 요약할 때 자립·자치·자전 정책이라 부르는데, 이것은 클락의 분류에 따른 것이다. 네비우스는 자립이라는 단어만을 사용했다.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세 가지는 자립(Self-Support), 자치(Self-Government) 그리고 자전(Self-Propagation)이다.
네비우스 정책 내용을 분석해 보면, 모든 선교 정책에 있어 핵심은 성경이다. 또 초기 장로교 선교사들이 수행했던 순회 전도는 네비우스 선교 정책에 있어서도 여전히 가장 우선순위에 뒀고, 성경공부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했다. 일단 전도를 통해 신자가 되면, 조직적인 성경공부에 참여해야 하는 정책이었다.
그리고 서로 연합하는 정신을 강조했다.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선교사들은 네비우스 선교 정책을 자신들의 효과적 선교 사역을 위해 채택하고, 그 방법을 시행함에 있어서도 매우 성공적이었다.
네비우스 방법의 효과는 한국교회 선교와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네비우스 선교 정책이 중요한 것은 평양신학교 교과목 중의 하나였으므로 중요하게 취급됐다.
그러나 단점도 없지 않았다. 그것은 신학자 양성에 미흡했다는 점과, 이로 인해 수준 높은 신학 교육이 실시 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신학 교육을 발전시키기보다, 목회자 양성에 더 큰 무게를 둔 것 같다.
이금석 교수
수도국제대학원대학교 목회대학원 교수(역사신학)
국제개혁 & 청교도연구소 소장
십자가교회 담임목사(합동)
📰 출처: 크리스천투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