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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는 누구의 편인가
본문
여호수아 5장 13–15절
서론
우리는 종종 이렇게 묻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입니까?” 어려운 일을 만나거나 중요한 결정을 앞두면 하나님이 내 편인지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이 내 편인가?”가 아니라 “나는 하나님 편에 서 있는가?” 오늘 본문은 바로 이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는 장면입니다.
본론
1. 전쟁을 앞둔 지도자의 긴장
여호수아 5장은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넌 직후의 상황을 보여 줍니다. 이 사건은 단순히 강 하나를 건넌 일이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40년 동안 광야를 지나며 하나님을 배우는 시간을 보냈고, 이제 새로운 세대가 약속의 땅 가나안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요단강을 건넌 사건 역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기적이었습니다. 여호수아 3장 15–16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범람하던 강이 멈추고 백성은 마른 땅을 밟고 건넜습니다.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셨던 것처럼 요단강에서도 길을 여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과거에만 역사하신 분이 아니라 지금도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분임을 보여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약속의 땅에 들어왔다고 해서 곧 평안이 시작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앞에는 여전히 넘어야 할 장벽이 서 있었습니다. 바로 여리고 성입니다. 난공불락의 요새를 바라보며 여호수아는 지도자로서 깊은 긴장 속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성경은 놀라운 장면을 기록합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서 있는지라”(여호수아 5:13) 전쟁을 준비하던 여호수아 앞에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나타난 것입니다.
◈요단강의 지리적 특징과 상징적 의미
요단강은 이스라엘 북쪽 헐몬산에서 시작하여 남쪽 사해까지 이어지는 강입니다. 길이는 약 250km이며 이스라엘 땅을 남북으로 가르는 중요한 수계입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흘러 내려와 사해로 들어가며, 주변에는 비옥한 평야가 형성되어 오래전부터 중요한 생활 기반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단강의 의미는 지리적 특징에만 있지 않습니다. 이 강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중요한 영적 상징이었습니다. 요단강은 광야와 가나안을 가르는 경계선이었습니다. 강 이쪽은 훈련과 기다림의 시간이고, 저쪽은 약속과 사명의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강을 통해 백성을 더 깊은 순종과 책임의 자리로 인도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크게 두 시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광야 시대는 하나님이 백성을 만들어 가는 시대입니다. 가나안 시대는 하나님이 약속을 이루어 가는 시대입니다. 광야에서는 백성이 형성되는 과정이 중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주셨고, 만나를 먹이셨으며,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곳은 정복의 현장이라기보다 훈련의 학교였습니다.
그러나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오면서 상황이 달라집니다. 이제 더 이상 매일 아침 만나를 받는 방식으로만 살지 않습니다. 약속의 땅에서 책임 있게 살아가야 하는 공동체가 됩니다. 여호수아 5장 12절은 이를 상징적으로 말합니다. “그 땅의 소산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더라” 이 말씀은 단순한 식생활의 변화가 아니라 시대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제 이스라엘을 광야의 방식으로만 인도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싸우며 순종해야 하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광야는 하나님을 배우는 시간이었고, 가나안은 하나님과 함께 싸우는 시간입니다. 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광야는 준비의 시대이고, 가나안은 사명의 시대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두 시대를 가르는 경계가 요단강입니다. 요단강을 건넜다는 것은 단순히 강을 건넌 것이 아니라 훈련의 삶에서 사명의 삶으로 들어간 것을 의미합니다.
2. 길갈에 진을 치다 : 전쟁보다 먼저 정체성을 세우시는 하나님
요단강을 건넌 뒤 이스라엘은 길갈에 진을 칩니다. “백성이 요단에서 올라와 그 달 십일에 여리고 동쪽 경계 길갈에 진 치매”(여호수아 4:19) 길갈은 이후 가나안 정복의 첫 기지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곳을 단순한 군사 기지로만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백성의 내면과 정체성을 정리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싸움보다 먼저 사람을 다루십니다. 길갈에서 하나님은 세 가지 일을 하십니다.
1) 할례를 다시 행하게 하심
광야에서 태어난 세대는 할례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십니다. “너는 부싯돌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여호수아 5:2) 할례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이라는 표였습니다. 하나님은 전쟁 기술보다 먼저 언약의 정체성을 회복하게 하셨습니다. 전쟁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무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서는 것이었습니다.
2) 애굽의 수치를 굴려 버리다
할례가 끝난 후 하나님은 선언하십니다.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여호수아 5:9) 그래서 그곳 이름을 길갈이라 하였습니다. 길갈은 “굴려 버리다”라는 뜻입니다. 애굽의 수치란 단순히 과거의 노예 생활이 아니라 노예 의식과 패배감까지 포함합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정복을 앞둔 백성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더 이상 애굽의 수치에 묶인 백성이 아니다.”
3) 첫 유월절을 지키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서 유월절을 지킵니다.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으며”(여호수아 5:10) 유월절은 출애굽의 은혜를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하나님은 전쟁을 앞둔 백성에게 먼저 은혜를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만나가 그쳤습니다(수 5:12). 이는 하나님이 공급을 멈추셨다는 뜻이 아니라 백성을 더 성숙한 자리로 옮기셨다는 뜻입니다. 광야에서는 하늘에서 공급하셨고, 가나안에서는 땅의 열매를 통해 공급하셨습니다. 길갈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은 한 가지 메시지를 줍니다. 전쟁보다 먼저 언약이 필요하고, 전략보다 먼저 정체성이 필요하며, 정복보다 먼저 은혜의 기억이 필요합니다.
3. 여리고 앞에 선 여호수아 : 지도자의 현실적 긴장
이제 본문은 여호수아 개인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서 있는지라”(여호수아 5:13) 이 장면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요단강은 건넜고 길갈에서 언약의 갱신도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냉정합니다. 눈앞에는 여리고 성이 서 있습니다. 여리고는 단순한 도시가 아니라 가나안 정복의 첫 관문이며 상징적인 요새였습니다.
여호수아 6장 1절은 여리고의 상태를 이렇게 말합니다. “여리고는 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 이 표현은 도시 전체가 완전한 방어 태세에 들어갔음을 말합니다. 높은 성벽, 닫힌 성문, 긴장감으로 가득한 공기, 그리고 안팎으로 흐르는 전쟁의 압박이 느껴집니다. 여호수아는 이제 단순히 믿음 좋은 한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운명을 책임지는 지도자입니다. 그러니 그의 마음속에는 수많은 생각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이 성을 무너뜨릴 것인가, 어떤 방식으로 전투를 시작해야 하는가, 군대를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 이 첫 전쟁에서 패하면 어떻게 되는가, 백성의 사기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성경은 그의 내면을 자세히 기록하지 않지만, 문맥상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전쟁을 준비하는 군사 지도자였고, 분명 전략을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불신앙이라기보다 책임의 무게에서 오는 현실적 긴장입니다. 믿음이 크다고 해서 생각을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의 지도자일수록 더 무겁게 현실을 마주합니다. 바로 그때 성경은 놀라운 장면을 보여 줍니다.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서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전쟁을 생각하며 서 있을 때, 이미 하나님은 그의 앞에 서 계셨습니다. 여호수아가 상황을 분석하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침묵 속에서 먼저 움직이고 계셨습니다.
4.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 : 인간의 질문과 하나님의 대답
여호수아는 즉시 그에게 다가가 묻습니다.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여호수아 5:13) 이 질문은 전쟁 상황에서는 너무나 당연합니다. 칼을 든 낯선 존재가 있다면 먼저 그가 아군인지 적군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질문은 단순한 군사적 질문을 넘어 인간의 본능적 사고를 드러냅니다. 우리는 언제나 세상을 둘로 나눕니다. 내 편인가, 남의 편인가. 우리를 지지하는가, 반대하는가. 유익을 주는가, 위협이 되는가. 여호수아의 질문은 자연스럽지만 동시에 인간 중심적입니다. 그는 전쟁을 “우리와 우리의 적들”이라는 틀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답은 그 틀 자체를 깨뜨립니다.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여호수아 5:14) 이 “아니라”는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가 제시한 두 선택지, 곧 “우리 편”과 “적의 편”이라는 구도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중립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한편에 소속되는 분이 아니라, 전쟁 전체의 주권자이십니다. 하나님은 누군가의 전술적 지원군이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이십니다.
그래서 이 본문은 여호수아의 질문을 뒤집습니다. 여호수아는 “당신은 누구 편입니까?”라고 물었지만, 하나님은 사실상 “네가 누구 편이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의 핵심입니다. 신앙의 문제는 “하나님이 내 편인가”가 아닙니다. 신앙의 문제는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는가”입니다. 우리는 자주 하나님을 내 계획 안에 모셔 오려 합니다. 하나님이 내 구상을 도와주시기를 원하고, 내 방식에 동의해 주시기를 원하며, 내가 정한 방향에 축복을 더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계획을 지원하는 조력자로 오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주권자로 오십니다.
출애굽기 14장 14절은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사무엘상 17장 47절에서 다윗은 선포합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승리는 군사력이나 전략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 속에서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을 내 편으로 만드는 데 있지 않고, 내가 하나님 편에 서는 데 있습니다.
5. 여호수아의 반응 : 즉시 엎드렸다
여호수아는 그 대답을 듣자마자 놀라운 반응을 보입니다. “여호수아가 땅에 엎드려 절하고” (여호수아 5:14) 여기서 여호수아의 위대함이 드러납니다. 그는 논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인데 왜 우리 편이라고 하지 않으십니까?”라고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즉시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예의가 아니라 영적 분별입니다. 그는 지금 이분 앞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작전 회의가 아니라 경배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지도자에게 가장 필요한 자질은 언제나 앞장서서 말하는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능력입니다.
야고보서 4장 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여호수아는 계속 장군으로 서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종의 자리로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여호수아 5:14) 이 말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제가 이런 계획을 세웠는데 검토해 주십시오”라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 말씀하십시오. 저는 듣겠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여호수아는 자신의 계획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로 옮겨갑니다.
신앙의 전환점은 바로 여기서 일어납니다. 신앙은 하나님에게 내 뜻을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앞에 내 뜻을 굽히는 것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참된 기도는 하나님을 설득하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앞에 내가 정렬되는 시간입니다. 여호수아는 이 순간 장군의 언어를 멈추고 종의 언어를 배우기 시작합니다.
6. 신을 벗으라 : 거룩한 자리 앞에서 내려놓아야 할 것
그때 하나님의 군대 대장은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여호수아 5:15) 이 말씀은 모세가 호렙산에서 들었던 말씀과 같습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애굽기 3:5) 이 유사성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출애굽의 지도자로 부르실 때와 같이, 이제 여호수아를 가나안 정복의 지도자로 세우시며 동일한 거룩의 원리를 가르치십니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사람은 먼저 하나님의 거룩 앞에 서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신을 벗는 행위는 단순한 예절이 아닙니다. 고대 문화에서 신발은 인간의 이동, 권리, 소유 의식을 상징하는 요소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을 벗는다는 것은 “이제 내 방식으로 걷지 않겠습니다”라는 고백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 신을 벗는다는 것은 내 권리를 내려놓는 것, 내 계획을 내려놓는 것, 내 방법을 내려놓는 것, 내 계산을 내려놓는 것, 내 확신과 자존심까지도 하나님 앞에 내려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호수아는 분명 여리고 앞에서 여러 전략을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성벽을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언제 공격하는 것이 유리할 것인가, 병력을 어떻게 운용할 것인가.’ 그러나 하나님은 먼저 그의 계획을 멈추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이 전쟁은 여호수아의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거룩은 인간의 유능함이 빛나는 자리가 아닙니다. 거룩은 인간의 주권이 멈추고 하나님의 주권이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시편 99편 1절은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는 인간의 능력과 계산이 먼저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실력보다 순종이 우선이고, 전략보다 경외가 우선입니다. 여호수아가 배워야 했던 것은 여리고를 무너뜨리는 기술 이전에, 하나님 앞에 서는 태도였습니다.
7. 오늘 우리의 질문 : 나는 누구의 편인가
이 본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매우 날카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삶의 수많은 갈등과 전쟁 속에서 늘 이렇게 묻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입니까, 하나님이 우리 가정을 도우십니까,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지지하십니까,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보호하십니까, 하나님이 내가 선택한 길에 동의하십니까. 그러나 본문은 이 질문의 방향을 바꿉니다. 하나님은 다시 물으십니다. “너는 누구의 편에 서 있느냐.”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마태복음 12:30)
신앙에는 중립이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어느 편엔가 서 있습니다. 세상의 편에 설 수 있고, 욕망의 편에 설 수 있고, 권력의 편에 설 수 있고, 자기 뜻의 편에 설 수 있습니다. 아니면 하나님의 편에 설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 20절에서 선언합니다. “너희는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신앙인은 자기 자신에게 속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값으로 산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내 뜻이 절대 기준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편에 선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 감정을 갖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기준을 하나님의 말씀 아래 두는 것입니다. 내 유익보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고, 내 주장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며, 내 성공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편에 선다는 것은 때로 손해를 감수하는 것이고, 때로 이해되지 않는 길을 걷는 것이며, 때로는 세상의 박수보다 하늘의 인정을 더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참된 승리가 시작됩니다.
결론
여리고 성이 무너진 이유는 이스라엘의 군사력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탁월한 전략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승리는 하나님께 속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여리고를 너희에게 넘겨주셨느니라”(여호수아 6:2)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먼저 중요한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을 내 편으로 만들려 하지 말고, 내가 하나님 편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승리는 하나님을 내 편으로 만드는 데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 편에 서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편이신가?”가 아니라 “나는 하나님 편에 서 있는가?” 이 질문 앞에 바로 서는 사람만이 여리고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승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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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이 내 편인지 묻지만,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는지는 깊이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주님, 우리의 생각과 고집을 내려놓게 하시고 여호수아처럼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리게 하옵소서. 우리의 계획보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는 믿음을 주옵소서.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 편에 서서 순종하며 살아가게 하시고,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승리를 경험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최원호 목사 (서울 상봉동 은혜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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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선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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