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조선 지배
일제는 1910년 8월 29일 한국을 강점한 이후 1945년 8월 15일까지 35년간 우리나라를 지배했다. 이 기간 동안 한국과 한국교회는 일제의 탄압을 받았고, 신앙의 자유 혹은 종교의 자유를 누리지 못했다.
일제의 조선 병탄 이후 통감부는 총독부로 승격되었고, 제3대 통감 데라우찌 마사타케(寺內正毅, 1851-1919)는 10월 1일 초대 총독으로 취임했다. 곧 그는 한일합병조약을 앞두고 제정된 집회취체령을 공포하여 모든 사회단체를 해산시키고, 치안유지를 빙자하여 경찰과 헌병대를 일원화한 조선주차헌병조례(朝鮮駐箚憲兵條例)를 발표하여(1911. 9. 12) 일본 헌병을 증원하고 경찰업무를 수행하도록 조치했다. 제1대 조선주차헌병 사령관으로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完二郞)가 임명되었다. 총칼에 의한 무단(武斷)정치를 감행한 것이다.
1910년 12월 3일, 총독부는 제령(制令) 제10호로 ‘범죄즉결법’을 공표하였다. 피의자의 진술과 경찰서장 인증만으로 즉결 처형할 수 있는 무서운 법이었다. 이로써 뒷날 105인 사건과 그 후 모든 탄압정치에서 드러난 바처럼, 고문으로 얻는 자백만으로도 유죄를 인정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그뿐 아니라 언론기관을 폐지하고, 1910년 11월부터 전국의 각도 군 경찰서를 동원하여 1911년 12월까지 우리나라 역사, 지리, 기타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서적들을 압수하고 20여만 권의 사서(史書)를 불살랐다. 그리고는 식민사관(植民史觀)에 입각한 『조선반도사(朝鮮半島史)』를 편찬하여(1915), 아시아사의 한 부분인 조선의 역사를 반도사(半島史)로 국한시키고, 일제의 조선 침략을 정당화했다.
1911년에는 ‘조선교육령’을 발표하여 식민지 지배에 필요한 일본어 교육을 강화하고, 조선인에게는 정당한 교육의 기회를 제한하였다. 제2차 교육령(1922)을 거쳐 제3차 조선교육령(1938)을 발표하여 ‘보통학교’를 ‘심상소학교’라는 일본식으로 개정하고 조선어를 선택과목으로 취급하였고, 제4차 조선교육령(1943)에서는 초등학교를 황국신민(皇國臣民)의 학교라는 의미의 ‘초등학교’로 개칭하고 교육체계를 전시동원체제로 전환했다.
황민화 정책 일환으로 1931년 11월 29일부터 조선에서 조선어 사용이 금지되었고, 1939년 11월에는 제령 19호로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을 개정하여 조선인의 성명제(姓名制)를 폐지하고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도록 창씨개명을 강요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기독교에 대한 탄압이 이루어졌다.
조선총독부의 기독교 정책
기독교는 일제 통치기간 중 가장 강력한 종교였다. 일제가 조선을 통치하기 시작한 1910년 이래 한국 사회와 국가, 그리고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조선총독부가 볼 때 한국 기독교회는 무시 못할 전국적 조직이었다.
1910년 당시 조선 기독교회는 20만 신도와 3백 개 이상의 학교, 3만이 넘는 학생, 1,900여 개 집회소, 270여 명의 외국인 선교사, 2천 3백여 명의 조선인 교직자를 거느린 무시할 수 없는 집단으로 이해되고 있었다(『조선총독부 통계연보, 명치 43년』, 조선총독부, 1912, 668-669). 그 밖에 많은 병원과 자선기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것은 신앙이라는 견고한 유대로 결합되어 있었고, 외국인 선교사들을 통해 세계 여론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그래서 조선총독부는 처음부터 기독교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 조선 통치에 이용하든지, 아니면 기독교를 탄압하여 그 영향력을 약화시키든지, 양자택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에 의해 다음 해 2월 조선통감부가 설치되어 초대 통감이 된 이또오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는 외국인 선교사를 우대하고 회유하여 대외 선전에 이용하고, 교회나 YMCA에 다액의 기부를 하여 의식 있는 사람들이나 청년들이 많이 모여 있는 기독교회의 반일운동을 약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런가 하면 3대 통감을 거친 후 조선총독부 초대 총독이 된 데라우찌는 기독교를 탄압하여 힘을 약화시키고자 한다. 그는 열성적인 불교도로서 기독교를 적대시한 인물인데, 1910년 10월 5일 신임 각 도(各道) 장관회의에서 총독부 시정개시 훈시에서, “조선에서는 기독교가 비교적 번창한 것으로 본다. … 고금을 통하여 신앙은 자유라고 하나 내가 통치하는 조선은 기강이 문란할 때는 그 내용을 바꾸어 정치상 필요한 통제를 해야 한다. 종교관계의 학교와 같이 상당한 감독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기독교는 조선에서 서구적 가치를 전파하며, 미신의 타파, 악습 폐지, 여권 신장, 관혼상제 변화를 가져왔고, 한글 보급, 서양 음악이나 스포츠 전파, 사회 계몽, 민주의식 등 사회개혁의 구심점이 되고 있었다. 특히 기독교는 민족 독립운동에도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를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 하는 점은 조선총독부의 시급한 현안이었다. 일제는 한국통치 시작부터 일면 회유 일면 탄압정책을 고수하였으나, 궁극적으로는 기독교세를 약화시켜 친일적 기독교 곧 황도주의 기독교로 변질시키고자 하였다.
이런 목적으로 일본은 조합교회(組合敎會)의 조선 선교를 기획하고 지원하여 1912년 전국 16개 교회가 조합교회에 가입하였고, 1913년부터 1917년까지 5년 동안 목사는 22명에서 98명으로, 교회 수는 45곳에서 143곳으로, 신자는 3,600명에서 1만 2,670명 으로 증가했다[이와사키 타카시, “한국강제병합과 일본교회” 「부경교회사연구」 35(2012.1), 79].
1919년에는 150개 교회, 80여 명의 교직자, 1만 4,400여 명의 교인을 거느리게 되었으나, 삼일운동 이후인 1921년 7개 교회, 3명의 교직자, 636명의 교인으로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한국인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이후 조합교회 활동은 사실상 중단되었고, 1921년 조합교회는 조선에서 철수했다.
한국 기독교를 억압하기 위해 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 사건이나 105인 사건을 조작하기도 했으나, 일제의 핵심 전략은 조선 기독교회에 대한 법적 제재였다. 그 대표적 경우가 바로 ‘포교규칙’이었다.
기독교회에 대한 법적 규제: 포교규칙(1915)
일제는 각종 법률을 제정하여 한국과 한국교회를 통제하고 신교(信敎)의 자유를 제한하였는데, 1910년부터 총독이 발하는 명령 곧 제령(制令)이 법률적 효력을 가짐으로써 그것이 이후 중추적인 법 제도를 형성하였다. 일제가 조선을 병탄할 때 1910년 8월 29일 제령 1호로 발표된 ‘조선에 있어 법령의 효력에 관하여’에서 대한제국 시대, 특히 통감부 시대 법의 대부분을 계승하였다.
한국 민중의 항일 저항운동을 규제하기 위한 ‘보안법(保安法, 1907)’, ‘경찰범처벌령(警察犯處罰令, 1908)’, ‘범죄즉결령(犯罪卽決令, 1909)’ 등이 그것이다. 병탄 이후 경찰범처벌령은 ‘경찰범처벌규칙(1912)’으로, 범죄즉결령(1910)은 같은 이름으로 더욱 규제와 처벌이 강화되었다. 조선인에 한하여 적용되었던 조선태형령(朝鮮笞刑令, 1912년 제정, 1920년 폐지)는 조선인 탄압법으로 악용된 악법 중 악법이었다. 이 법은 일본인의 자의적 판단에 의해 반일적인 언행은 모두 태형의 대상이 되었다.
조선형사령(朝鮮刑事令, 1912)은 일본 형법, 형사소송법을 식민지 통치를 위한 형사법으로 개편한 것으로써, 고유한 조선인 차별적 형사법이었다. 검사는 현행범이 아닌 사건이라도 피의자 구속이 가능했고, 동시에 그 권한을 사법 경찰관에게도 부여하였다. 또 사법 경찰관은, 피의자를 14일까지 구치가 가능했다. 변호인 없이 개정(開廷) 할 수 있었다.
이 법은 1912년 제정으로부터 1938년까지 12차에 걸쳐 개악되어, 태평양 전쟁 말기에는 조선전시형사특별령(朝鮮戦時刑事特別令, 1944), 조선총독부재판소령 전시특례(朝鮮総督府裁判所令戦時特例, 1944), 조선에서의 재판 절차 간소화를 위한 국방 보안법 및 치안 유지법 전시 특례에 관한 법률(1944) 등이 발표되어, 한국인에 대한 통제와 감시, 처벌이 더욱 강화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회에 대한 통제법이 제정되었는데, 그것이 ‘포교규칙(布敎規則)’이었다. 1915년 8월 16일 공포된 ‘포교규칙’은 조선 교회의 신앙과 사상, 종교 활동까지 통제하려는 의도에서 제정되었다. 1898년 일본의회에 상정되었던 종교법이 그 모델이었다.
전문 15조와 부칙으로 구성된 이 법안은 일본에서는 종교계 반발이 심해 제정되지 못했으나, 식민지 조선에서는 제령 83호로 공포되었다. 이 포교 규칙은 크게 포교 활동 허가제와 종교단체에 대한 엄격한 감시를 골자로 하고 있었다. 주요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제1조 (종교의 정의): 본령(本令)에서 ‘종교’라 함은 신도(神道), 불교 및 기독교를 말한다.
제2조 (포교자 신고): 종교 포교에 종사하고자 하는 자는 명칭, 포교 방법, 교의 요령 등을 갖추어 조선총독에게 신고해야 한다.
제3조 (포교 관리자): 일본의 신도나 불교 종파가 포교할 때는 ‘포교 관리자’를 두어 총독의 인가를 받아야 한다.
제4조 (감독권): 조선총독은 포교 방법이나 포교 관리자가 부적당하다고 인정될 때는 그 변경을 명령할 수 있다.
제6조 (시설 설립 허가): 교회, 사찰, 포교소 등을 설립할 때는 명칭, 위치, 부지, 유지 방법 등을 적어 총독의 인가를 받아야 한다. (1920년 개정 시 ‘신고제’로 바뀌었으나 실질적 감시는 지속되었다.)
제9조 (보고 의무): 포교 관리자나 주지는 매년 포교 상황과 신도수 등을 보고해야 한다.
제12조 (정지 및 폐쇄): 포교자가 안녕질서를 방해하거나 포교 목적에 위반되는 행위를 했다고 인정될 때는 포교를 정지하거나 포교소를 폐쇄할 수 있다.
제15조 (유사 종교 준용): 조선총독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 유사 종교 단체에 대해서도 이 규칙을 준용할 수 있다.
1조에서 종교를 신도, 불교 기독교로 규정하였고, 천도교, 대종교 등 민족 종교는 ‘유사 종교’로 분류하였다. 즉 일제는 종교를 ‘공인종교’와 ‘유사종교’로 구분하고, 법적인 통제 하에 두기 쉬운 종교(신도, 불교, 기독교)만 공식 종교로 인정한 채, 민족주의 색채가 강한 종교들은 ‘유사 종교’라는 이름으로 탄압했다.
이 포교규칙을 보면, 포교자 신고제 및 허가제를 규정하여 포교하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성명, 주소, 포교 방법 등을 총독부에 신고하게 했고(2조), 교당이나 포교소 설립을 통제하였다. 즉 사찰, 교회, 성당 등을 세울 때는 명칭, 위치, 부지 면적 등을 상세히 적어 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9조). 뿐만 아니라, 신도수 변동이나 포교 실적, 예산 집행 내역 등을 정기적으로 보고하도록 강제했다. 이런 규정 때문에 포교자에게는 포교자 자격을 획득해야 했고,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자격증이 해 종교기관장에 의해 발부되었다(사진1).
또 포교자의 이동, 거주자 변경 시 이를 조선총독에게 보고해야 했다. 그래서 주기철 목사가 부산 초량교회에서 시무한 후 마산 문창교회로 이동할 때 ‘포교담임자변경계(布敎擔任者變更屆, 사진2)’와 ‘포교자거주지이전계(布敎者居住地移轉屆)’를 제출해야만 했다(사진3).
이런 보고 규정보다 더 심각한 제재는 포교를 중지하거나 폐쇄할 수 있게 규정한 점이다. 비록 ‘안녕질서를 해치거나 포교의 목적에 위반된다고 판단할 경우’라고 명시했으나, 이는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조항으로서 교회를 폐쇄하거나 포교 곧 전도 활동을 금지할 수 있게 규정한 것이다(12조).
이는 종교의 자유나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고 종교활동을 ‘행정적 허가’ 대상으로 만들어 국가 권력 통제 하에 둔 것이다. 즉 기독교회를 비롯한 종교단체의 종교활동, 인사권과 재산을 장악하여 종교인들이 총독부의 지시에 순응하게 만든 것이다.
이 법은 삼일운동 이후 선교사들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여 1920년 4월 7일 ‘개정포교규칙’이란 이름으로 개정되었다. 교회당 설립의 경우 총독부의 허가를 의무화했으나 신고제로 완화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교회당에서 안녕질서를 문란케 할 우려가 있다고 인정할 때는 그 사용의 정지 또는 금지를 명할 수 있게 했다(9조)”. 이런 이유로 교회별 신도수, 신도수 증감을 매년 신고하도록 했고, 각종 교회 집회와 설교를 감시하고 통제하게 된 것이다.
‘포교규칙’은 교회를 폐쇄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한 것으로서 한국교회를 탄압하기 위한 규정이었다. 그런데 최근 이런 포교규칙과 같은 입법 시도가 한국교회에 커다란 위협이 되고 있다.
민법 개정안 발의
조국혁신당 출신 무소속 최혁진 의원이 지난 1월 9일 대표 발의(공동발의자 김우영, 김준혁, 김재원, 권칠승, 염태영, 이건태, 이성윤, 송재종, 서미화, 손솔)한 민법 일부개정안에 대한 기독교계의 반발이 거세게 일어나고 있다.
현행 민법 38조의 “법인이 목적 이외의 사업을 하거나, 설립허가의 조건에 위반하거나, 기타 공익을 해하는 행위를 한때에는 주무관청은 그 허가를 취소할 수 있다”는 기존 조항에, “법인이 대한민국 헌법 20조 2항에서 정한 정교분리의 원칙 또는 공직선거법 등 관계 법령을 위반하여 선거, 정당 또는 후보자와 관련하여 조직적 체계적으로 정치 활동에 조직적 반복적으로 개입하여 공익을 현저히 해한 때”라는 조항을 덧붙였다.
또 38조의 2항을 신설하여 “① 주무관청은 법인이 38조 1항 각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사유가 있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때에는 해당 법인에 대하여 업무 및 재산 상황에 대한 보고를 명하거나 필요한 자료의 제출을 요구할 수 있다. ② 주무관청은 1항에 따른 확인을 위하여 필요한 경우 소속 공무원으로 하여금 법인의 사무소, 사업장 또는 그 밖의 장소에 출입하여 장부, 서류, 그 밖의 물건을 검사하게 하거나 관계인에게 질문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 80조 잉여재산의 귀속에서는 4항을 신설하여 “그 잔여 재산은 국고에 귀속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민법 개정안이 표면적으로는 법인격 남용 방지를 내세우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종교단체의 자유를 크게 위축시킬 수 있는 독소조항이 포함되어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이번 개정안 발의 배경에는 신천지나 통일교의 불법적 정치개입 의혹이 자리잡고 있지만, 기존 형법과 공직선거법으로 충분히 처벌이 가능한 상황에서 종교의 자유권까지 위협할 수 있는 법 개정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번 민법 일부개정안의 핵심은 주무관청의 조사권 신설과 설립허가 취소 사유의 구체화이다. 개정안의 핵심은 “비영리법인이 헌법상 정교분리의 원칙을 위반하여 특정 정치세력과 결탁하거나 조직적으로 정치에 개입할 경우 주무관청이 설립 허가를 취소할 수 있다”고 규정한 것이다.
특히 개정안 38조 2항을 보면 행정 공무원이 법원 영장 없이도 법인 사무소에 출입하여 장부와 서류를 검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두고 있다. 이는 헌법상 영장주의 원칙을 위배하는 것으로, 수사기관이 아닌 행정부가 종교단체를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는 초법적 권한을 갖게 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 법이 제정되면 종교활동이 위축되고 교회나 종교법인도 폐쇄될 수 있다는 점에서 ‘종교법인 강제해산법’ 혹은 ‘교회폐쇄법’으로 인식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는 일제 때 포교규칙과 같은 악법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한국 교계는 주목하고 있다.
이상규 박사
백석대 석좌교수
고신대 명예교수
📰 출처: 크리스천투데이